배스 낚시를 시작하면서 배스가 들어온 배경에 대해 알아보던 중 정리를 깔끔하게 하신분이 있어 옴겨왔습니다.
대한민국 배스의 역사
배스, 그들은 어떻게 왜 우리나라에 살게 되었나?
삶이 지금보다 넉넉하지 못했던 1970년대 초, 국민에게 보다 나은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 중 한가지로 미국이 원산지인 배스라는 물고기를 들여오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정확히 1973년 6월 15일 미국의 루이지애나 내수면 연구소로부터 국내의 한 내수면 연구소로 500마리의 배스 치어가 공수되었다.
이때 들어온 배스는 리지마우스 배스와 스몰마우스 배스등 두종류의 배스였다.
미국의 배스낚시는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필자에게 배스낚시에 대하여 교육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 중에서 가끔 “배스의 맛은 어떠한가?”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매우 중요한 이슈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미국이나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의 모든 나라가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낚시를 하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사회가 발전하고 개인의 부가 축적되기 시작하면서 낚시라는 장르는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한 행위에서 벗어나 여가활동을 충족시키기 위한 여가 활용방법, 또는 낚시도구 및 주변기기의 고급화를 추구하게 되는 기술의 발전과정등을 통해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해 정치망이나 그물같은 도구로 물고기를 마구잡이로 포획하는 어로행위와는 전혀다른 방법인 사람이 물고기와 1:1로 게임을 하여 사람이 이기면 즉시 물고기를 낚아내는 장르로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미국의 배스낚시에 있어 180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의 기록을 살펴보자.
이때는 미국도 낚시가 먹거리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생미끼를 사용하여 닥치는데로 배스를 잡아 기다란 막대기에 명태꿰듯 배스를 꿴 후 자랑스럽게 집으로 가져가 가족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니 말이다.
이 시절의 배스는 미국사람들에 있어 매우 유용한 물고기였다.
그로부터 약 100여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배스낚시는 어떻게 변화 되었는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다시피 미국은 지금 몇천만원씩하는 배스 전용보트를 몰고다니며 레저와 스포츠를 겸하는 스포츠 피싱으로 배스낚시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그렇다고 먹기위한 낚시에서 완전히 손을 뗀건 아니다.
가족들의 대환영을 받기 위해 배스낚시를 하는건 100여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게 없지만 달라진게 있다면 지금은 배스를 상금으로 바꾸어 집으로 가지고 온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금도 배스가 먹고 싶다면 한두마리를 집으로 가져가고 있는게 그들이다.
아! 불쌍한 대한민국 배스
그러면 1973년 하고도 6월15일에 우리나라에 상륙한 미국산 배스는 29년이 지난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으며 무슨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서두에 설명하였듯이 분명 ‘단백질 공급원’이라는 이유로 우리나라에 유입될 당시에는 많은 양식업자들과 물고기 관련사업자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내노라하는 권력자를 앞세워 배스 치어를 분양받기위해 치열한 로비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호응의 강도를 미뤄 짐작할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관계자들의 대단한 환영을 받으며 한국에 상륙한 배스는 채 그 뜻을 펴보이기도 전에 자신들을 환영했던 관계자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뭇매를 맞고 이땅에서 영원히 퇴치되어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놓이게 된다.
그러면 어쩌다가 배스가 이땅에서 멸종시켜야할 외래어종이 되었는지 그 내막을 한번 알아보자.
배스는 우리나라 토종물고기의 씨를 말리기 때문에 잡아 없애야 한다.
배스를 들여온 내수면 연구소에서는 배스치어의 외부 유출을 철저히 차단한채 종묘를 생산할수 있는 성어로 키워낸다.
이때 배스중 스몰마우스 배스는 사육도중에 모두 폐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스몰마우스 배스가 유속이 있는 강계에서 주로 서식하는 생태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를 고려하지 않고 내수면 연구소 내에 있는 사육조(정수역)에서 사육하다가 폐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뭇튼 배스를 사육한지 2~3년만에 라지마우스 배스의 치어를 종묘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생태적 습성과 우리나라 수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민통선 안에 있는 토교저수지(물흐름이 없는곳)와 경기도 청평에 있는 조종천(물흐름이 빠른곳)에 치어를 방류하게 되었다.
조종천에는 1975년부터 1978년까지 매년 치어가 방류하였으며(약 20,000마리) 토교저수지에는 1980년 단 한차례만 500마리의 치어가 방류되었다.
이렇게해서 한정된 공간(조종천, 토교지)에 치어를 방류한 후 배스의 생태적 습성 및 수계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고자 했던 연구소의 의도는 뜻하지 않은 문제로 1981년부터 방류를 중단하게 되고 배스에 대한 모든 자료를 창고 깊숙히 집어넣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 이유는 배스에 대한 문제점이 발견되기도 전에 시대 상황에 걸맞는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라지마우스 배스의 생태적특성은 1.정수역 2.온수성 어종 3.Live bait(살아있는 먹이감)로 단정할 수 있는데 조종천과 토교지에 방류된 배스는 이러한 특성에 의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서식처를 이동해 버렸다.
우선 토교지에 방류된 배스를 살펴보자.
토교지에 방류된 배스는 매우 빠른속도로 자라났다.
앞에서 지적한 라지마우스 배스의 3가지 특성을 모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교지의 물은 그목적이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봄이 되면 용수로로 저수지의 물을 빼게 된다.
그러나 무심코 지나친 사실 중 하나가 이 용수로가 한탄강과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봄에 용수로를 따라 한탄강으로 유입된 배스는 한탄강의 강력한 유속을 견디지 못하고 하류로 떠내려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전곡댐에 다다른 배스의 치어는 그곳에 둥지를 틀고 무럭무럭 자라게 된다.
하지만 이곳의 배스는 90년대에 들어서도 그다지 커다란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았는데 이유인즉 한탄강을 무대로 그물을 치며 생계를 이어가는 어부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어쩌다 잡히는 배스에 대해서도 새로 들어온 외국산 물고기정도로만 인식했지 어식성 어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어부들의 그물에 걸리는 물고기의 양이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90년초 이곳에서 붕어낚시를 하다가 배스를 잡은 적이 있는데 외국에서 들어온 민물농어 정도로만 알았으며 매운탕을 끓여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조종천에 방류된 배스였다.
생태적 특성으로 인해 흐르는 물에서 적응해 살기가 어려운 라지마우스 배스들은 흐르는 물을 따라 하류로 흘러갔다.
아마 지속적으로 조종천에 배스의 치어를 방류한 이유도 방류한 배스가 모두 떠내려가버려 이듬해 개체수 확인이 불가능해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조종천은 청평댐 바로 아래의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이렇게 북한강으로 유입된 배스는 보다나은 서식처를 찾아 하류로 내려가는데 이곳이 바로 팔당댐이다.
토교지에 방류된 500마리의 배스중 일부가 한탄강에 유입된 후 불과 몇 년만에 한탄강 어디에서도 쉽게 발견될 정도로 급속하게 성장했는데 약 20,000마리의 배스가 팔당에 들어갔으니 그것도 전곡댐보다 훨씬 좋은 서식조건을 가진 팔당댐에 유입됐으니 그후의 사건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팔당은 그렇지 않아도 환경론자들과 황색언론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공격받고 있던터라 이럴때의 배스 출현은 이곳에서 그물로 생계를 이어가는 어부들과 환경보호론자들에 의해 집중포격을 받게 되는 단초를 제공해 버린다.
그러한 와중에도 어떻게 구했는지 지방의 양식업자들은 배스의 치어를 구해 양식을 시도한다.
그러나 어린배스는 양식장의 사료에 반응을 하지만 체장이 10cm이상이 되면 철저히 살아있는 먹이감에만 반응을 하게 된다.
이점은 양식업자들이 미쳐 알지 못했던 사실로 이 즈음에 배스의 양식을 포기하고 아무 미련없이 물속에 놓아주게 된다.
이렇게 해서 안동호 및 운암호, 파로호로 배스가 퍼져 나가게 된다.
90년대 초부터 팔당을 중심으로 배스가 어쩌구 저쩌구하는 말이 나오더니 급기야 90년대 중반에는 배스의 수입을 결정한 관리들이 나서서 배스퇴치를 외치게 된다.
일이 이쯤되자 내수면연구소의 배스 연구는 완전히 물건너 가버렸고 초창기 수입목적인 먹기위해 기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채 급기야 배스의 보급을 위해 연구한 연구원들에게 어떻게 하면 배스를 퇴치하는가에 대한 과제마져 내려졌다.
배스는 지금 배스퇴치를 명분으로 배스낚시를 하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90년대 초에 있었던 한강 대홍수는 팔당에 머무르고 있던 배스를 강화도내륙에 있는 수로와 석모도까지 유입시켰다.
90년대 중반 몇번에 걸친 북부지역 폭우가 전곡댐을 붕괴시켜 그곳에 조용히 살던 배스를 임진강까지 보내 버렸다.
장마철의 큰비는 안동호의 물을 낙동강으로 보냈으며 이를 따라온 배스가 낙동강계 전역을 헤메고 돌아다니게 만들어 버린다.
한강에서 잡은 붕어나 잉어를 작은 저수지에 방류하는 과정에서 배스의 치어가 딸려 들어간다.
1998년과 1999년의 게릴라성 집중폭우는 배스를 완전히 전 수계로 퍼지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99년 현재 수중 생태계 보호론자들이나 어부들 그리고 황색언론의 요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수계에 배스가 퍼져 버렸다.
만일 배스를 도입할 당시처럼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단백질의 섭취가 절실했다면 어쩌면 어쩔수 없었던 배스의 강계유입에 좀더 관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향어나 민물돔처럼 사료 양식이 가능하거나 떡붕어처럼 다른 물고기의 알과 치어를 먹어치우는 어종이라도 대낚시꾼의 낚시대상어가 될 수 있었다면 우리나라 낚시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대낚시꾼들의 환영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당당하게 낚시하는 배서를 보고 싶다.
배스가 유입되기전 우리나라 강계의 수중먹이사슬의 정점에는 쏘가리와 가물치가 위치하고 있었다.
정수역인 호수나 저수지에서는 쏘가리의 개체수가 많지 않아 가물치나 끄리, 메기등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배스가 유입됨으로 인해서 생태계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배스 또한 수중먹이사슬의 맨꼭대기에 위치함으로 인해 유입된 장소에 서식하고 있는 가물치와 먹이경쟁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따라 평형을 이루고 있던 피식자(배스나 가물치의 먹이감)의 개체수가 부쩍 줄어들게 된다.
어부나 붕어 낚시꾼은 이 싯점에서 정말 배스를 때려 죽여야할 나쁜 외래어종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끄리나 메기는 배스의 먹이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알자리를 지키며 새끼의 부화를 돕는 배스의 산란 특성 때문에 개체수의 확산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내수면의 생태를 연구하는 한 생물학 박사는 배스의 수중 먹이사슬 파괴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한다.
“먹이사슬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는 수계로 배스가 유입되면 어느정도의 기간동안은 먹이사슬의 균형이 깨지고 각각의 층에 위치한 물고기나 구성요소의 개체수에 일대 변화가 발생합니다.
피식자는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포식자가 많아졌기 때문이지요. 당연히 피식자의 수가 줄어들지요. 하지만 물고기들은 산란과 공식을 통해 자신들의 개체수를 유지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어요. 이러한 자체노력으로 인해 배스의 유입으로 무너져버린 먹이사슬을 원래대로 복원하는데는 약10~12년 정도가 소요됩니다. 사람들의 무분별한 남획만 없다면 말이지요.”
지금 우리나라의 대형 수계에 유입된 배스는 유입된지 20년 이상이 지났다.
안동호 또한 수면적의 거대화로 인해 이러한 수중먹이사슬의 복원이 더디긴해도 최근의 낚시조과를 분석해보면 어느정도의 개체수 균형이 이루어진게 아닌가 한다.
배스낚시를 하는 배서들만이라도 이러한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고 배스를 퇴치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낚시가 아니라 진정한 스포츠 피싱으로서 배스낚시를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배스낚시인은 당당해져야 한다.
배스는 물속에 있고 배스를 잡는건 배서의 능력이고 그것을 놔주던 매운탕을 끓여먹던 그건 배서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배스클래스 낚시선생
링크 - http://www.bassclass.org/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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