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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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

by Bell.. 2018.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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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朴烈, 박렬, 1902년 3월 12일(음력 2월 3일) ~ 1974년 1월 17일)

 

 -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본명은 박준식(朴準植) 간토 대지진 직후 대역사건 중 하나인 박열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된 후 1945년까지 22여년간 투옥 후 출소하여 일본에서 결성된 한국인 교민단체인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의 초대 단장(1946년 10월 ~ 1949년 4월)을 지냈다.

 

1922년 김약수·정태성 등과 함께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전국노동자 제군에 격함'이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박열은 1923년 4월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고,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때 증발한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이 있는 장덕수를 잡아다 구타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 같은 해 관동대지진 이후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일본어: 金子文子)와 함께 1923년 10월에 히로히토 황태자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되었다. 불령사가 다이쇼 천황과 히로히토 황태자 등을 폭탄으로 암살하기로 모의했다는 혐의 때문이었으나, 사건 자체가 과장,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가네코 후미코는 몇달 뒤 감옥 안에서 자살 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발표되었다. 박열은 22년 2개월을 복역하고 해방 후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2018년 11월 17일 박열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를 독립유공자로 발표 하기로 했다.

 

 

 

 - 박 열 관 련 영 화 -

 

 

"조선인에게는 영웅, 우리한텐 원수로 적당한 놈을 찾아."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퍼진 괴소문으로 6천여 명의 무고한 조선인이 학살된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관심을 돌릴 화젯거리가 필요했던 일본내각은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던 조선 청년 '박열'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한다.

"그들이 원하는 영웅이 돼줘야지"

일본의 계략을 눈치챈 '박열'은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사형까지 무릅쓴 역사적인 재판을 시작하는데....

조선인 최초의 대역죄인!
말 안 듣는 조선인 중 가장 말 안 듣는 조선인!
역사상 가장 버릇없는 피고인!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은 사상 초유의 스캔들! 그 중심에 '박열'이 있었다!

 

 

 

ⓒ위키백과,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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