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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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by Bell.. 2018.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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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에 대한 신의로 시작된 파병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냈다.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4차례 국회동의를 거쳐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은 32만 명이다.

 

베트남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동서냉전으로 남북이 분단된 나라였다. 스탈린의 승인 아래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켰을 때 한국은 미국 등 16개국 연합군의 도움으로 침략을 물리쳤던 경험이 있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인들은 처지가 같은 월남에 일종의 연대감을 느끼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 전선은 한국전선과도 직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월남 지원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강화하고, 한반도 전쟁억지력의 중추인 주한미군의 감축을 막을 수 있는 전략적인 방안이라고 믿었다.

 

미국과 월남 정부가 공식으로 한국의 파병을 요청해오자 한국정부는 국회동의를 얻어 1차로 이동외과병원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요원 10명을 보냈다. 뒤이어 2차파병 요청이 있었고, 한국은 국회동의를 얻어 후방지원과 건설 지원 임무를 수행하는 2,000명 규모의 비전투부대를 파병했다

안보론에 따른 전투군 파병


한국군의 제2차 파병이 있었던 1965년부터 베트남 전황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에 따라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는 다시 한국에 1개 사단 규모의 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해왔다. 당시 미국은 본토의 예비 병력과 해외 주둔군의 일부를 베트남전에 투입하였기 때문에 주한 미군 2개 사단도 언제 월남으로 이동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전투부대의 파병이 거론되자 한국 내 야당과 지식인들이 거세게 반대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안보가 최우선”이라는 판단 아래 8월 13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 파병을 결정하였다.

 

한국군은 월남전에서 강력한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전투병력 부족으로 애로를 겪고 있던 미국정부는 월남의 작전환경에 한국군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한국군 전투 병력 증파를 요청하였다. 한국정부에서도 “5만 명 선 까지는 무리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1966년 3월 20일 국회의 의결을 거쳐 수도사단 제26연대와 제9사단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닉슨 독트린
1969년 1월 미국의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은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정책’을 내 걸고 월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계획을 발표했다. `자국의 방위는 자국이 맡아야 한다`는 이른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한 것이다.

 

그 무렵 월남의 한국군의 병력은 47,860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은 1단계로 1972년까지 약 1만 명의 병력을 철수시켰다. 2개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전투병력(37,000여 명)은 1973년 초 휴전이 될 때까지 계속 남아있었다. 월남의 한국군 병력규모는 1972년 후반기부터 미국의 지상군 규모를 능가하였다. 9년 동안의 참전에서 한국군은 5,099명이 전사하고, 11,232명이 부상했다. 참전 한국군 중 다수가 고엽제 피해로 아직도 후유증을 앓고 있다.



 

마음의 빚을 남긴 베트남 파병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자유우방에 대한 신의’라는 명분에서 시작되었지만, 한반도의 안보이익과도 직결된 것이었다. 당시 남북한의 무력균형은 북의 우세로 기울어져 있었다. 북한은 1968년부터 청와대 무장특공대 기습사건, 대규모 게릴라부대 후방침투(북평삼척무장공비사건), 미해군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 무력도발을 잇달아 벌이고 있어서 한국은 안보를 위해 주한미군의 전쟁억지력이 절실할 때였다. 월남전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은 한국전쟁 이래 가장 위험했던 안보위기를 극복하고 자주국방태세를 위한 중화학공업을 성공적으로 이룩하여 무력균형에서 북한보다 우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월남전은 경제적으로도 한국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장병들의 급여 송금과 한국기업들의 현지 진출등으로 나라에 부족했던 외환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참전군인과 기업들의 해외경험은 그 후 중동건설시장 진출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월남 패망과 함께 끊겼던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1992년 수교로 재개되었다. 1993년 포 반 키엣 수상이 방한하였으며, 1996년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8월에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이 방한했을 때 "우리는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공식 사과 하였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도 베트남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하였다.

 

수교 이후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관계는 크게 발전하였다. 2015년 기준 베트남은 한국의 4번째 주요 수출국이 되었으며, 베트남에 세워진 삼성전자의 휴대폰 생산시설은 수만의 일자리를 만들고, 베트남의 국제수지를 흑자로 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출처:Korea100,이미지:베트남전 참전 맹호부대 환송식 (1965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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