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의 옛이야기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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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군포의 옛이야기 (설화)

by Bell.. 2018.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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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군포의 옛이야기 한 가지식 알아오라는 숙제를 가지고 왔다.

어느덧 군포에서만 살아온 날이 몇년인데 옛이야기를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한번 찾아 보았다. 몇 개 있겠어 하는 생각으로.

엄청 많았다.

 

 

 1. 군포1동

아구랑 유래(1)

아구랑은 지금의 군포1동 우리은행 사거리에서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아구랑은 한자로, 아름다울 아(阿), 언덕 구(邱), 솟을 대문 랑(閬)자를 쓴다. 아구랑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조선조 14대 선조의 열한번째 아드님인 경평군 (京平君)의 손자가 군포로 낙향을 하면서 “아름다운 언덕에 솟을 대문이 아름답다.” 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아구랑 유래(2)

아구랑은 ‘아우랑’이라 불린 적도 있는데, 이렇게 불리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이곳에는 가난하지만 사이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다. 일찍 부모를 여읜 형제는 어딜 가도 함께 다니며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남보다 몇 배나 부지런하고 싹싹한 성격이어서 온 동네 사람들이 그 형제를 좋아했고, 남다른 우애를 부러워하였다.

한편, 이웃마을 아구랑 언덕과 지금의 재궁동인 쟁골 사이의 월구지(산의 부리가 뾰족 나와서 곳을 이룬다 하여 월구지라고 함) 고개참에 효심이 지극한 참한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형제가 모두 그 처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차에 혼인 이야기가 나왔다. 형은 처녀를 좋아하는 동생의 마음을 아는지라, 눈물을 머금고 동생한테 양보하였고 동생은 얼마 안 있어 그 처녀와 혼인하게 되었는데 그 후 그만 형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동네 사람들이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고 안타까워하며, 아구랑 언덕을 형제가 사이좋게 지나다니던 때를 그리워하며 아우랑이라고도불렀다고 한다.

형이 아우랑을 떠나 정착한 마을 어귀에는 당산나무격인 큰 느티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는데(지금은 군포시 보호수로 지정), 형이 농사짓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동생을 그리워하며 느티나무 아래에서 흘린 눈물 때문에 느티나무의 반쪽이 잘 자라지 못해 줄기 반쪽은 움푹 패였다고 한다. 큰말과 넘말 사이에 있는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나무로 마을의 안녕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제사를 해마다 지내기도 하였다. 한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형은 그런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는 듯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천성이 착해서 이사 온 동네에서도 마을에 힘든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힘닿는 데까지 도움을 주고 몸을 아끼지 않아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고, 뒤늦게 가정을 꾸려 여생을 행복하게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전한다.

새우대 유래

옛날에 바닷물이 그곳까지 들어와서 새우젓을 담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컨테이너 기지창고로 사용되는 곳이다. 지금도 그곳을 깊이 파보면 조개가 나온다고 한다.

도램말(도랫말)

지금부터 200여년 전에 도랫말에는 김씨 성을 가진 두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은 부유하였고 동생은 가난했다.
그런데 동생네는 아들이 있었으나 형은 아이가 없었다. 마음씨 착한 동생 부부는 형님댁이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밤마다 정한수를 떠놓고 백일치성을 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동생의 꿈에 형님집 우물에서 큰 용 한 마리가 머리를 내밀고 하늘로 솟구치더니 동생집의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난 동생은 하도 이상하여 부인에게 이야기 하였더니 부인 역시 똑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도 계속 형님이 아이를 갖도록 기도하였으나 형님은 태기가 없고 도리어 동생댁이 다시 아이를 갖게 되었다. 형님댁에서 계속 소식이 없자 동생은 큰아이를 형에게 주기로 하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기로 결심하였으나 형님이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동생은 마음을 굳히고 아내와 함께 정처없이 길을 떠나 한곳에 정착하였다. 동생은 가난하였지만 다복하였고 자녀들도 장성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한 동생은 형수가 홀로된 것을 걱정하여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을의 이름이 “돌아온 마을”이라는 뜻에서 ‘도램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 마을의 우물은 쌍룡이 노는 물이라서 이 우물의 물을 마시면 쌍둥이를 낳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는 해마다 쌍둥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당정동 유래

지금은 군포1동에 속한 당정동은 본래 과천군 남면의 한 지역으로 ‘신당’ 밑에 우물이 있어 ‘당우물’ 또는 ‘당정’으로 불리웠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현재의 큰말 경부선 철로변에 물이 잘 나오는 샘물이 있었는데, 부곡동의 주민들이 대골에서 당제를 지낼 때 이 물을 떠다가 사용하여 당우물(堂井)로 불렀고, 그후로 우물이름을 따서 당정리(堂井里)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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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군포2동

삼성마을 유래(1)

삼성마을에는 유적지가 될 만한 것들이 많다. 칠팔백년 된 은행나무를 비롯해 주자를 모시고 유학자들이 모여서 제향을 드리는 삼성사와 역사가 백년이 넘은 삼성리 교회 그리고 삼성교회 옆 서당이 있다. 이 서당의 한학 선생님들은 해방 후까지도 계셨으며, 이곳에서 공부한 곽씨들은 벼슬길에 많이 올랐다. 이밖에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삼성교회 안에 ‘삼성학원’을 세웠는데 4년제 초등학교인 이 학원은 다른 지역보다 일찍 개화교육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지역의 유지들은 모두 그곳에서 공부를 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유적지가 많고 유래가 있으며 인재가 많이 나는 마을이기에 별성(星)자를 써 ‘삼성(三星)’이라고 붙여졌다고 하는데, ‘삼성’이라는 발음이 어렵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이를 ‘삼세이’라고 불렀다 한다.

삼성마을 유래(2)

이 마을의 호칭을 삼성(三姓, 三聖, 三星)이라고 하는 데는 다음의 세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 신안 주씨(新安朱氏), 인동 장씨(仁同張氏), 현풍 곽씨(玄風郭氏)의 세 성씨가 처음에 세거하여 살고 있어 마을 호칭을 삼성(三姓)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둘째로 주자(朱子)를 모신 영당이 있어 이를 모현재라고 하였고, 또한 옛날 이곳에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수도에 정진하였으며, 다른 지역보다 먼저 이곳에 서당이 설립되어 많은 사람들이 옛 성인들의 성리학을 수학하여 삼성(三聖)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셋째는 별이 빛난다는 뜻인데, 이곳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산자수려하고 서당이 있어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타지역 주민들이 부러워하는 마을로서 빛나고 있다고 하여 삼성(三星)이라 하였다는 설이 전한다.

감투봉 아가씨 전설

군포2동(부곡동) 삼성마을에는 ‘감투봉 아가씨’ 전설이 전하고 있다. 이 마을은 옛날부터 과거공부하는 소년들이 각처에서 많이 모여들어 공부하며 등과를 위해 정성을 올리는 마을로 유명했다. 위치상 한양이 가깝고 삶의 이치를깨우쳐주는 신령스러운 기가 있다는 수리산(修理山)을 뒤로 하고 있으며, 남북으로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가르는 삼파산(감투봉)의 높은 봉우리와 삼태기 같이 포근하면서 종모양을 하고 마을 가운데 복스럽게 살짝 뻗쳐 나온 언덕그리고 양 골짜기 사이 바위에서 솟아나는 두 샘물이 있어 명당 터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이 마을은 예로부터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인재가 많았고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과 그 가족들이 온갖 정성을 올리는 곳이 되어 그에 얽힌 애절한 이야기 또한 전해지고 있다. 천년 가까운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는 삼성마을 샘물 우물가에는 빨래하는 아낙네들이 항상 모여들었다. 그 아래로는 주야로 소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서당이 있었고, 멀지 않은 곳 남쪽 언덕에는 유교 성리학을 창건한 주자(朱子) 곧 주희를 모시는 사당인 모현재(慕賢齋)-삼성사가 있었다.

과거공부를 하러 온 청년들 중에 우물가와 모현재 사이를 자주 오가며 글을 읽고 달님에게 정성 드리기 좋아하는 총각이 있었는데 우물가에서 동네 아가씨들에게 물을 가끔 얻어마시곤 하다가 한 예쁜 아가씨에게 마음을빼앗겨 남모르게 사랑하게 되었다. 결국은 밤이면 남몰래 우물가에서 혹은 은행나무 밑에서 혹은 과거시험 합격을 비는 산줄기 서낭당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달이 떠오르면 달님에게 꼭 과거에 등과하게 해달라고 함께 정성을 다해 빌었다. 때가 다가와서 과거시험 방이 나붙고, 청년은 아가씨에게 꼭 합격하여 돌아올 것을 굳게 약속하고는 한양으로떠났다. 아가씨는 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샘물을 떠놓고 뒤뜰에서 빌고, 우물가 옆 은행나무에 절하며 삼성사와 서낭당에 가서 빌고 또 빌었다. 그것도 모자랄 것 같으면 뒷산의 높은 산본(山本)마을로 향한 중턱에서 물이 철철 흐르기로 유명한 ‘원수(元水)’물을 떠가지고 감투봉으로 올라 달님에게 빌며 소년이자 장차 낭군이 될 청년이 꼭 장원급제 하기를 매일 기원하였다. 그런 정성이 통하였는지 청년은 드디어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노란 옷에 화관을 쓰고 삼일유가를 다니며 장원급제 행차를 하고 삼성마을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아가씨에게 그만 이변이 생기고 말았다. 아가씨는 청년의 장원급제 소식에 너무 기뻐 이는 하늘의 달님이 도우신 덕이라 생각하고 감사의 기도와 앞으로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빌기 위해 감투봉에 올랐다. 그때 산기슭 용호리 마을에서 힘겨루기를 하느라 잘 다투던 호랑이와 용이 마침 샘물가에서 아가씨를 보고 그 마음씨와 외모를 탐내어 사람으로 변해 서로 차지하겠다고 감투봉 아래까지 따라 올라가 그 편편한 봉우리에서 무섭게 싸우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모르고 아가씨는 마냥 달님에게 빌고 있었고, 한편 과거에 합격하여 돌아온 청년은 아가씨를 백방으로찾았으나 보이지 않자 예전에 같이 달님에게 소원을 빌던 감투봉으로 항햐게 되었다. 멀리서 보니 역시 아가씨는 감투봉에서 물을 떠놓고 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앞에 사람처럼 보였던 사내 둘이 싸우고 있다가 갑자기용과 호랑이로 변하여 무섭게 싸우는 것이 아닌가. 청년은 소리쳐 아가씨를 불렀고, 아가씨는 사랑하는 낭군의 외쳐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청년은 보이지 않고 웬 무시무시한 호랑이와 용이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는 모습만이 앞을 막았다. 그 모습에 아가씨는 그만 까무라쳤고 청년은 나뭇가지와 돌로 호랑이와 용을 처치하고는 지친몸으로 아가씨 앞으로 다가갔으나 아가씨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그동안 지나치게 정성을 다하느라 몸이 쇠약해진데다 흉악한 짐승들이 싸우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아 계속 깨어나지 못하였고 청년은 아가씨를 밤새도록 껴안고 흔들며 울었다.
다음날 마을사람들은 장원급제 축하잔치를 준비하고 청년을 찾았으나 도대체 찾을 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감투봉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난밤 추운 날씨에 두 남녀가 꼭 부둥켜안고 얼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후 이 마을은 이 봉우리를 마치 장원 급제한 벼슬아치의 관모와 같이 생겼다 하여 관모봉이라 이름붙이고, 애절한두 남녀의 못다한 사랑의 사연을 생각하여 감투봉 아가씨 전설을 후세에 전해오고 있다. 이후 정월 보름이 되면 젊은이들은 쇠가죽 큰북을 밤낮으로 치며 악귀와 도둑을 내몰기 위해 마을 안을 돌아다녔으며 저녁이 되면 감투봉에 올라 옛 전설을 생각하고 둥근 보름달이 뜨는 것을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그해 장가를 갈 수 있다고 하며 풍성하고 떠들썩한 보름행사를 즐겼다.

삼성마을 농바위 유래

절골(대야동의 바람고개 동남쪽에 있는 납다골 북쪽 골짜기) 위쪽으로 농바위가 있다. 생김새가 여자들이 시집갈 때 해 가지고 가는 장롱처럼 생겨서 농바위라고 부른다. 정월 보름날 저녁에 이곳에 올라가서 제일 먼저 달 뜨는 것을 보는 총각은 장가를 간다는 속신이 있어서 총각들이 앞을 다투어 올랐다고 한다.

용호마을과 경주김씨 할아버지

군포의 오래된 씨족으로 군포2동 용호마을과 신기마을에 주로 살고 있는 경주김씨가 처음 용호마을에 정착하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 전 조선시대에 경주김씨 상촌공파 김직 할아버지가 군포지역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즈음 용호와 신기마을을 흐르는 개천에는 큰 오리나무가 있었고 김직은 노곤한 몸을 이끌고 오리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청하였다. 그의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서는 ‘요골(지금의 용호마을)에 올라가서 터를 잡고 살아라’고하였고 그 뜻을 따라 지금까지 여러 대를 이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용호마을은 풍수지리상 좌청룡, 우백호의 지역으로 그 한가운데 주산에서 지금도 마을의 경주김씨들이 모여 산제사를 정성스럽게 올리고 있다.

신기마을 생긴 내력

김직 할아버지가 군포 용호마을에 정착한 이후 경주김씨의 자손이 무궁하게 번창하여 새로운 마을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으로부터 2백~3백여년쯤 전에 용호마을과 잇닿아 있는 새로운 마을에 터를 닦아 자손들을 분가시켰는데 그곳이 지금의 베네스트 골프클럽 맞은편의 신기마을이다.

신기마을 허여방아와 동서남북 소나무 이야기

신기마을 위쪽으로는 ‘허여방아’ 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정월대보름맞이 때 올라가서 달맞이 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바위는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위에 올라가면 움직이는 흔들바위로 마을의 명물이었다고 전한다. 그 바위 아래에는 동서남북 소나무라는 400여년 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나무의 네 가지가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키고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큰 가지에 올라가면 가지 하나가 앞마당만큼 편편해서 아이들이 그곳에서 놀기도 했다고 전하는 이 소나무는 일제시대 때 아쉽게도 광솔용으로 베어져 없어졌다고 한다.

도꼬마치 고개 내력

도꼬마치 고개는 용호와 신기 사이에 있는 고개로, 높이가 30m 정도이다. 예전에 이 지역에 도둑이 들끓었는데 ‘도꼬마치’라는 고개 명칭은 도둑을 막기 위한 방비를 하는 ‘도둑막이’가 ‘도꼬마치’로 와전된 것이라 한다.

정자골 벚나무

군포에서 유일하게 오래된 벚나무가 있는 곳으로, 연못이 있었던 형태가 지금도 남아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완용의 생질인 한씨성의 사람이 한일합방 당시에 이곳에 살았는데, 이곳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벚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박오양씨는 정자골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며 한학을 가르치던 분이었는데 이 정자에서 선비들과 모여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가마모태 신부 이야기

모태는 ‘모퉁이’가 변형된 이름으로 ‘가마모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전에는 결혼할 때 신부가 가마를 타고 신랑집으로 오는데 시집이 멀면 그 거리가 상당히 소요되었다고 한다. 옛날 아주 추운 한겨울에 신부를 태우고 정자골을 올라가던 가마꾼들이 아무래도 기척이 이상하여 가마안을 들여다보니 모진 추위에 신부가 얼어죽어 있었더라는 이야기로 지금도 정자골 올라가는 모퉁이를 ‘가마모태’라고 부른다.

느진골과 소금장수

군포2동의 삼성마을과 대야동 사이에 있는 골짜기를 느진골 고개라고 하는데, ‘느슨하다’, ‘늘어졌다’는 뜻으로 만곡현(晩谷峴)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던 고개로 소금장수가 무거운 소금을 지고 팔러다니던 시절에는 높지는 않지만 길게 늘어져 있는 고개를 넘기가 하도 지루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당시 군포에서 가까운 안산을 지나 대부도 서해안 쪽에는 아직도 염전이 남아있고 그때도 소금장수들의 왕래가 빈번했었다.

부자마을 부곡의 유래

조선 중엽 어느 해인지 몹시 가물어 인근의 마을에서는 심은 모가 모두 말라 죽어갔으나 부곡 마을의 논에는 물이 많아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을 부자 마을이라 하여 부곡리라 불렀다는 설이 전한다. 또 하나는 조선중엽 남양부사가 부임차 이곳(현 부곡 변씨촌)에 들러 어느 민가를 찾았더니 몹시 궁색한 생활을 하고 있기에 주인에게 묻기를 “이 마을의 이름이 무엇인고?” 하니 주인이 답하기를 “예, 말씀 드리기 황송하오나 이 마을은 예로부터 대문과 울타리 등 없는 것이 12가지나 되는 빈골(貧谷)이옵니다.”라고 하였다. 남양부사는“어허 듣기가 매우 거북하구나. 아무리 가난해도 빈골은 너무 했구나. 이왕이면 부골(富谷)로 하는 것이 좋겠구나.” 라고 하였다 한다.
이후부터 이 마을을 부곡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3. 산본동

산본(山本) 지명의 유래

산본(山本)은 우리말의 ‘산밑, 산아래’를 한자로 나타내기 위해 붙여진 것으로 경남 김해시 진례면 산본리,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산천리 산본마을 등 산밑 마을을 나타내는 여러 예가 있다. 산본의 명칭은 조선시대에는 ‘산저리(山底里)’였고, 일제 식민지가 되기 전인 1871년(고종 8년)에는 ‘산본리(山本里)’ 로 처음 문헌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4. 금정동

금정동 금우물의 유래

금정동은 본래 과천군 남면 금정리였는데 본래 큰 샘이 있는 곳이어서 금우물, 금물 또는 금정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한 벌판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어느 곳이나 파기만 하면 물이 잘 나와 물긷는 여인들의 옷깃을 적신다하여 금정이라 했다고 하며, 또다른 이야기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원행 가는 길에 이곳 큰 샘에서 물을 마셨으므로 금정이라 한다는 설이 전한다.

5. 재궁동

재궁동(쟁골마을)과 과천처사 이야기

오금자리 북동쪽에 있는 쟁골마을은 조선 초기에 한성부사를 지낸 송복산(宋福山:1390~1467)이 묘를 쓴 후 그의 둘째 아들인 송찬(宋瓚)이 단종이 폐위사사되자 관직을 사절하고 낙향하여 묘아래 두어칸의 초려(草廬)를 짓고 그 문과 창을 한양쪽인 북향으로 향하게 하여 임금을 잊지 않는다는 뜻을 표명하고 거처한 곳이다. 빈객들조차 들이지 않고 글을 보내 스스로 즐기며 자기의 지위나 행적을 숨겼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과천처사(果川處士)라고 불렀다. 그후 그의 후손인 여산송씨 문중에서 초려를 개축하여 재실(齋室)로 사용하였으며 이후부터 이곳을 재궁골(齋宮洞)이라 불렀는데 일반적으로는 ‘쟁골’이라고 부른다. ‘재궁’이 ‘쟁’으로 와전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이곳에 있었던 산소들은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시청 뒤의 동산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6. 오금동

원수물골 유래

감투봉 북쪽 산본쪽으로는 ‘원수물’이라 불리는 샘이 있다. 이 물은 마르지 않고 흘러서 가재가 사시사철 살 정도로 풍부한 샘이다. 산 중턱인데도 물이 마르지 않아 그 물이 산본천을 이루는 원류가 되며,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해서 '원수물(原水)' 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바위에서는 물이 계속 흐르고 있다.
장수가 숨은 원수물골 이야기 원수물골에는 또다른 이야기가 전하는데, 옛날 어느 전란 때에 한 장수가 피하여 인근의 도장굴골로 들어왔다.
더 깊이 들어오다가 감투봉 밑의 원수물골에 이르러서야 한숨을 쉬면서 ‘원 숨을 만한 골짜기로구나 ’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7. 광정동

광정동과 안양군

과천군 남면 산본리였다가 1995년 분리되어 광정동이 된 이곳에는 조선 9대 성종대왕의 셋째아들인 안양군(安陽君)의 묘가 있다. 그의 4대손 옥담(玉潭:1579~1657)은 이곳에 처음 낙향하여 증조부(안양군의 아드님)를 비롯하여 선조들의 묘를 지키며 묘하(墓下)에 살았다고 한다. 옥담은 어려서부터 칼쓰기, 활쏘기 등 무예를 좋아하여 성년이 되자 활을 쏘고 풍류를 즐길 정자를 짓는 일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꿈에서 정자터에 찬란한 빛과 함께 우아한 정자의 빛이 나타났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뒤에 정자를 완성시키자 꿈에 본 정자를 염두에 두고 광정(光亭)이라 불렀는데, 후에 마을 이름도 광정이라 했다고 한다. 옥담은 그후 7형제를 두고 광정 북쪽에 있는 산실고개에서 살았다고 한다. 광정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월과 7월에 길일을 택해 수리산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거북바위

거북바위는 현재 태을봉과 관모봉 사이에 있는 전주 이씨 종산에 위치한 자연석이다. 바위가 머리부분, 몸체부분, 뒷부분으로 3등분되어 있는데 거북 모양을 하고 있다고 ‘거북바위’라고 불린다. 원래는 지금의 산본 고등학교 후원에 있던 것을 신도시 개발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신도비의 지석으로 거북이 형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주 이씨 문중에서는 문중 소유지에 있던 거북바위를 지석삼아 그 위에 안양군(安陽君)의 신도비를 세워 놓았다.
예전 옮기기 전에는 무속인들이 거북바위를 괴석으로 여기고 촛불 기도 등을 많이 행하였다고 한다.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한때 폭파 위기에 놓이기도 하였는데, 그때 거북바위에서 ‘귀 달린 뱀’을 본 사람이 있다고도 전해진다.

왕자를 구한 거북과 노랑바위 전설

노랑바위는 수리산 산신제당 위쪽인 관모봉 중턱에 있는 바위로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옛적에 어느 임금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불혹을 넘도록 왕통을 이를 왕자가 없어 근심하고 있었다. 지극 정성으로 기원하여 드디어 하늘이 감복했는지 기골이 장대한 왕자가 태어났다. 왕자가 세 살이 되던 해 전란이 일어나자 궁궐을 떠나 강화도로 피난가기 위해 나룻배를 탔으나 심한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다. 배가 난파하려는 순간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나 왕자를 태우고 육지로 나와 은신처를 찾던 중에 이곳까지 다다라 관모봉 중턱에 이르렀다. 거북이의 등에 업혀 며칠을 굶다보니 왕자의 몰골은 말이 아니어서 왕자에게 드릴 음식을 구하기 위해 거북이는 마을로 내려갔고, 거북이의 뜻을 모르는 왕자는 거북이 자신을 버리고 가버린 것으로 오해하여 분한 마음과 배신감에 사로잡혀 바위를 힘껏 주먹으로 내리쳤다.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무너지면서 왕자를 덮쳤다. 왕자는 노란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었고, 마을로 내려간 거북이는 우박처럼 쏟아지는 바위를 맞아 죽었다. 그 후부터 왕자의 피가 흐른 이 바위를 ‘노랑바위’라 불렀고, 광정마을에 안양군의 신도비가 세워진 바위를 ‘거북바위’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8. 궁내동

궁내(宮內) 유래

궁내는 궁내동의 아파트 단지인 묘향마을 부근에 있었던 자연마을이다. 이 마을 서쪽 수리산 기슭이 전주이씨 사패지(공신이나 종친, 기타 나라에서 특정인에게 내린 땅을 말함)이고, 이 산에 조선왕조 어느 대군의 묘가 있어서 궁내 또는 궁안이라 불렀다고 한다. ‘궁(宮)‘이란 왕실의 궁궐 이외에도 종실에 딸린 묘(廟)나 사당도 ‘궁’이라고 하며 궁의 안쪽을 뜻한다. 광정동에 있는 전주 이씨 안양군묘(조선성종의 삼남 이항의 묘)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한편 ‘궁안’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이 지역이 궁에 소속된 땅이므로, 그 안쪽이 되는 지역을 ‘궁안’이라 불렀다고 한다.

9. 수리동

방아골 유래

수리동의 산본터널 북쪽 입구에 있는 골짜기이다. ‘방아’라는 이름이 붙은 곳은 그전에 물레방아가 있었던 곳이거나 지형이 디딜방아를 닮은 경우가 많다. 옛날의 디딜방아는 Y자형으로 생겨서 두 사람이 발을 딛게 되어 있는데 골짜기나 산 또는 물길이 갈라져서 Y자형으로 생긴 경우에도 ‘방아골’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이곳은 그전에 방아골과 원수물골이 갈라지는 형태의 골짜기였다.

초막골 유래

수리동의 군포시환경관리소에서 북쪽으로 뻗은 골짜기이다. 이 일대는 본래 마을로 되어 있었던 곳으로 조선총독부 간행 자료에는 ‘초막동’으로 나온다. 또 한글학회 발간자료에는 초막동=담배촌이라 하여 담배농사를 많이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막’이란 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이은 집을 말하며 대개 조그만 막집을 뜻한다. 최근 초막골 일대에서 대규모 습지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에는 국수나무, 오리나무 등 여러 종류의 환경지표식물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0. 대야동

대야미 유래

대야미는 큰 논배미가 있었다고 하여 일제시대부터 불려진 이름이다. 본래 광주군 북방면(北方面)에 속한 지역으로 1994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군포시에 편입되어 대야동으로 줄여 부르게 되었으며 속달동, 둔대동, 도마교동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대야미는 날아다니는 ‘벌’의 형국 이라는 말이 전하는데 면적은 넓지 않지만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안에서 생산해서 먹기보다는 밖에서 먹을 것을 물어오는 경우가 더 많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벌’의 형국이니 갖다 주는 것을 먹는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범밧굴과 월미도 이야기

동래정씨 집안의 정난종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던 시대부터 내려온 이야기이니, 한 600여년 가량 이어진 이야기이다. 군포 2동(당동)과 오금동 경계의 수리산 줄기 갈치저수지 인근의 범밧굴은 골짜기가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범밧골에는 커다란 돌 굴이 하나 있는데, 사람이 한 명 기어들어갈 만한 넓이라고 한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작은 굴이 있다는데 그 작은 굴을 자꾸 기어들어 가다 보면 인천의 월미도가 나온다고 한다. 그만큼 굴이 깊다고 하여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예전에 사냥을 하던 시절에는 포수가 사냥감을 몰아가면, 짐승들이 이 굴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굴 입구에 불을 지펴 짐승이 나오도록 유인한 탓에 지금도 굴 입구에는 시커먼 자국이 남아 있다.

범밧골과 도깨비 이야기

윗동네를 범밭골이라고 했는데 범이 들썩 들썩 해서 그렇게 불렸다고 전한다. 그곳은 나무가 우거지고 밤이면 사람도 지나다니지 않았는데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 갈 때도 내외가 무서워서 같이 가자 했다고 한다. 밤에 서 있으면 저만치 건너에서 불이 일어났는데, 도깨비불이 어느 집으로 들어가면 좋지 않다고 했다. 저녁에 키가 구척 같은 사람이 오라고 해서 갔다가 밤새도록 끌려 다녔는데, 새벽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지깽이였다는 도깨비 이야기도 전한다. 도깨비불은 가랑골에서 나와 범밭골로 가곤 했다고 한다. 밤이면 범밭골에서 범이 내려와 집의 개를 물어 가곤 했다. 마을에서는 사람을 잡아가지 말라고 개를 한 마리씩 내주었다고 하며,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연못에서 낚시질을 하면 범이 내려와 물고 갔다고 한다.

갈치 저수지와 갈대

범밧굴이 있는 산 인근에는 지금도 낚시꾼들이 즐겨찾는 갈치 저수지가 있다. 원래는 동네 이름을 따서 속달저수지라고 불려야 마땅한데, 행정구역을 나누는 과정에서 갈치 저수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갈치’는 ‘갈티’라고도 하는데, ‘갈티’는 예전에 이 일대에 갈대가 많았다고 해서 불려진 이름이다. 현재 대감천이 흘러내리는 그 일대의 들판으로 둔대초등학교 서쪽 들녘을 이른다. 근래에는 ‘노산(蘆山)’이라고 불리는 마을을 이른다.

우물골 유래

수리산 줄기 야산에 있는 우물이 있던 지역을 우물골이라 불렀다. 예전에 이곳에서는 10월 상달이 되면 당주를 정하여 산고사를 지냈는데 고사를 지내던 시절에는 당제에 쓰던 물을 길렀던 우물이 있다고 하여 ‘우물골짝’이라고도 불렀다. 반드시 이 우물에서만 물을 길렀고 평소에는 그 물을 신성히 여겨 먹지 않았다고 한다.

우뢰산(우래산) 유래

대야동(둔내)의 둔터 마을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우뢰산 또는 우래산으로 불리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우뢰산이 지금의 수리산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려고 떠내려 오는데, 이미 수리산이 자리잡고 있어서 ‘울고 돌아섰다’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산을 둔터에서는 안산이라 하고, 속달에서는 우래산이라 부른다.

납덕골 유래

수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반월천 상류의 마을로 속달동의 최북단에 있는 마을이다. 이 일대는 산골로는 조금 펑퍼짐한 지대를 이루어서 ‘납작골’이라고도 불린다. 행정명으로 덕현(德峴)이라고 적는다. 이곳에는 군포8경의 하나로 선정된 ‘당숲’이 있어 그 아름다운 경치로 군포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봉수굴과 노적봉

인근에 쌍마혈이라고 하여 이쪽에도 들판, 저쪽에도 들판이 난 곳이 있다. 그래서 한쪽은 큰 봉수굴, 나머지는 작은 봉수굴로 불렸다. 현재 덕고개 덕현(德峴)으로 가는 길에 있는 지역을 이르는데, 판서골의 남쪽이 작은 봉수굴, 판서골의 위쪽이 큰 봉수굴이다. ‘봉수’는 옛날에 통신수단인 봉수대를 뜻하는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큰 봉수굴과 작은 봉수굴에서는 노적봉을 산처럼 쌓았는데, 산을 사이에 놓고 쌓은 큰 노적봉, 작은 노적봉 위에 사람들이 서로 바라볼 정도로 높게 쌓았다고 하며 그만큼 노적봉을 산처럼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동래 정씨

동래부원군 종가(익혜공家)의 묘자리 동래정씨 정난종 할아버지는 슬하에 사형제를 두었는데, 둘째 아드님인 문익공의 자손들에서 가장 정승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보통 문중의 산소는 할아버지부터 층층이 내려앉는 형국인데, 문익공 가문의 산소는 할아버지 묘소가 가장 아래에 위치해 있다. 칼을 끼었다가 빼는 형국인 ‘도장혈’이라고 하여서 제일 아랫부분에 가장 큰 어르신이 계시고 위로 올라가면서 묘를 써야 한다고 하여 배치하게 된 것으로 지금도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당이다.

판서골 유래

현재 속달의 갈치저수지 서쪽에 있는 마을이름이다. 옛날에 어느 분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정승과 판서가 많이 나온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곽, 여, 지 삼성(三姓)이 주를 이루었으나, 현재는 정씨와 이씨가 일가를 이루고 있다.

점성고개

점성고개는 반월저수지 인근에 있는 고개이다. 현재 안산시로 넘어가는 길목의 고개이름으로 바지고개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재 중앙동 인근이며, 이 밖에 ‘무내미’라는 곳이 있다.

구룡굴

유래 군포시에서 안산시로 넘어가는 지역인 대야동의 송정 마을 서쪽 골짜기 부근에 ‘구룡굴’이라는 곳이 있다. 명칭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본래 아홉 구멍이 뚫린다고 예언된 곳인데 지금은 여섯 개만 뚫려 있어서 세 개의 굴이 더 뚫려야 된다고 전해진다.

신성한 군웅숲

10월 초하루에 군웅제를 지내는데, 숙종대왕이 군웅제를 지낸 숲이라고 해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군웅이란 능을 위하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이 일대에 예전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예전에는 이 인근에 부정한 것들을 가지고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신성시했다고 전해진다.

군웅터

고사 덕고개 언덕에서 쭉 내려오면 구릉지가 있는데, 구릉처럼 생겼다고 해서 ‘구릉터’라고 부른다. 이 군웅터는 마을에서 신성하게 생각하는 곳으로, 매년 음력 10월 1일에 군웅터고사를 지낸다. 군웅터에는 볏짚으로 만들어 놓은 터주가리가 있는데, 매년 볏짚을 갈아주고 통돼지를 올려 제를 지낸다. 고사를 지낼 때는 농사가 잘 되어 풍년이 들게 해 달라고 빌고, 마을의 일년 간 안녕을 기원하며, 마을 집집마다 다 축원을 해 준다. 이 군웅터 고사는 20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군웅터 주변의 군웅숲은 수령이 200년 이상 된 신갈나무 등이 우거져서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숲으로 꼽히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군웅숲을 신성하게 생각해서 숲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그 옆을 지날 때도 조심스레 지나갔다고 한다.

테미산과 용의승천

대야동(둔내)의 반월저수지 동쪽 끝에 위차한 산이다. 산 정상은 안산시와 군포시 경계가 된다. 둔터마을 동북쪽의 우뢰산이 이 산 때문에 북쪽으로 밀려나서 테미산 남쪽 남사평이 서울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한다.
또 이 인근의 저수지가 막히기 전에 귀가 달린 커다란 구렁이가 살았다고도 한다. 이 구렁이가 이무기가 되었다가 용으로 승천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알 수가 없다. 봉우리가 테를 두른 듯이 동그란 형상을 하고 있다.

학자골 욕심많은 부자이야기

예전에 학자골에 커다란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 큰 부자가 살았다는 집이다. 학자골의 부자는 날마다 찾아오는 손님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하루는 중이 시주를 왔길래 도대체 귀찮아서 못살겠으니, 손님을 그치게 할 방도를 알려 달라고 하였다. 중이 선심을 베푸는 일이 마땅하다고 타일렀지만, 주인이 계속 졸라대자 학자골 넘어가는 골짜기에 돌담을 치면 손님이 그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주인은 귀찮은 마음에 당장 일꾼들을 시켜 돌담을 쳤다.
그 이후로 집안이 홀랑 망하여서 찾아오는 손님도 없어지고, 와도 줄만한 양식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출처 : 군포시 문화관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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